정보사회학 Scholar가 나에게 가르쳐준 “Secret”

지난 학기(2011년 가을)에 제1기 정보사회학 Scholar로 선정되어 미국에 어학연수 겸 인턴쉽을 다녀온 학생들의 후기를 싣습니다. 원은란 양에 이어 김예지(07) 양의 글입니다. 어학연수나 유학을 계획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많이 될 내용이라고 생각됩니다.

 

미국에 간다는 건, 내게 꿈이었다

영어 공부에 관심이 많았고 해외에도 관심이 많았던 나에게 해외연수는 가장 가까운 장래 희망사항, ‘꿈’이었다. 하지만 나는 4학년 막바지였고,  집안 형편은 유학을 보내 줄 만큼 좋지가 않았기 때문에 그건 정말 말그대로 내게 “꿈”일 뿐이었다 .

그 대학생활 내내 지리하게 품고 있었던 꿈을 놓아주려 할 때쯤, 믿기지 않는 기회가 찾아왔다. 정보사회학과에서 해외연수를 위한 장학금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 벽보를 처음 보던 날,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전율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혹시나 하는 희망이 나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내게 마지막 기회였다. 이 기회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에 욕심이 차고 넘치고 흘러 넘쳐 간절한 마음으로 정보사회학과 Scholar 에 지원하게 되었다.

곧, 희망과 간절함은 현실이 되어 돌아왔고, 나는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에 가게 되었다. 꿈으로 끝날 뻔한 꿈을 정보사회학과 Scholarship이 이루게 해주었다.

(설명 :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꿈이 이루어지던 순간)

나는 최고야, 라는 자신감 혹은 거만함

미국에 갈 때즈음, 아마 나의 자신감은 대학에 온 이래 하늘을 찌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전 학기에 나는 모든 과목에서 올 A+을 받고 100% 장학금을 받았었고 여러가지 학교에서 진행한 연구 및 성과들에서 좋은 평을 받았으며, sns에서 퍼진 자료 덕분에 외부에서 여러가지 제의도 받았던 상태였다. 또, 조모임의 조장이나 페스티발의 기획도 맡아서 하면서 단체 활동, 그룹간의 커뮤니케이션에도 자신감을 얻었으니 그 때 나의 콧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나는 미국에 갈 때 정말, 아무 것도 무섭지 않았다. 아무리 힘든 일이 오더라도, 나라는 사람은 잘해낼 것이라는 자심감 혹은 거만함이 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설명 : 학교에서 했던 여러가지 그룹 활동 중 )

Oh, my god!! 이건 내가 꿈꾸던 꿈이 아니야!

– 실망, 좌절, 불평불만들

모-든 것은 상상과 달랐다. 내가 가져왔던 하나의 환상이 깨지고 또 다른 환상이 깨졌고 또 그 다음 다른 환상이 깨졌다. 도착한 첫 날, 13시간을 날라왔는데 나는 ‘주막집’이라는 곳에 가서 김치찌개를 먹고 있었다. 주막집에서 나오니까 우리은행이 있었고 바다 횟집도 있었으며, 신라제과도 있었다. 거리에는 한국인들이 넘쳐났고 간판도 죄다 한국어로 되어있었다. 정해진 집으로 갔더니 또 한국인 집주인 아주머니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금발과 파란 눈의 나라를 상상한 첫째 환상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둘째 환상. 같이 간 동기와 가기 전에 하던 말이 있었다.  “우리 미국에 가면 공원에 가서 노래부르자. 사람들에게 그림을 그려주자. 매일 매일 지나가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구를 만들자!” 곧 그것 역시 무참히 깨졌다. 차없이는 우리는 아-무데도 갈 수 없었다. 우리는 하루종일 누군가가 데릴러 와 주기만을 기다리며 집에 있었다. 집 근처에 나가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마치 다시 어린이가 된 양,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아무 데도 나가지 못하는 바보가 되었다. 그 곳에서 20분 정도 걸어나가면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씩 있었고, mall 을 가려면 버스를 타고 2시간을 가야했다.

(설명 : 차없이는 아무 곳도 갈 수 없었던 버지니아)

또 우리는 ‘최소 생활비’로 미국 생활을 해야했다. 처음엔 매일 매일 우유와 씨리얼만 먹었고 그 다음엔 피넛버터와 잼만 바른 식빵을 물리도록 먹었다. 우리가 먹는 가장 맛있는 음식은 음식점에 남은 음식을 싸와서 냉동했다가 해동해먹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즐기고 싶었던 것들에 대한 환상도 깨졌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학교를 다녔고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간간히 인턴을 하게 된 회사 업무를 받아서 일을 했다. 일주일 빼곡히, 자유 시간이란 없었다. 너무도 버거운 시간들이었다.

감사하게 받았던 기회, 간절했던 꿈은 어느 순간 아무리 마음을 다 잡으려 해도 어서 끝내 싶은 악몽이 되어가고 있었다.

구박의 시작, 신데렐라 라이프

– 너는 잘나지 않았어

환상이 깨지는 속도와 비슷하게 나의 자신감도 날이 갈수록 무너져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우물 안에서 우쭐 우쭐 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도착 3일 후, 처음으로 회사로부터 업무를 받았을 때 나와 동기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다른 인턴들보다 우리가 더 잘 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고 최선을 다해서 결과물을 제출했다. 마치 학교에서와 같은 코멘트, 혹은 칭찬을 기대했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는 늘 뭔가를 기대했지만 날이 갈수록 끊임없는 지적들만 무수하게 날라왔다. 깨졌고 또 깨졌고 또 깨졌다. 학교에서 하던 연구와 회사에서의 실무는 그룹 커뮤니케이션이나 일의 방식에서 완전히 달랐다. 처음엔 화가 났고 이해하지 못했고 두번째로는 서러웠다. 그리고 나서는 머리를 맞은 듯이 내 실수와 내 잘못,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인정했고 머리를 숙였다. 나는 잘나지 않았었다. 나는 사회인으로서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가일 뿐이었다. 내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서야, 모든 것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인턴후기 :  http://www.kobeusa.org/home/index.php?mid=kor_kobe_internnews&document_srl=2847  )

주말에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샌드위치 가게에서 일을 했다. 비교적 간단한 아르바이트였는데도 그 곳일도 쉽지 않았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남미  사람들이었는데 약간 텃세를 부렸다. 자기네들끼리 스페인어로 떠들고 웃곤 했는데 특히, 내가 미국인들이 와서 주문을 할 때 못 알아듣고 공황상태에 빠져서 실수라도 하면 도끼눈을 뜨고 째려보거나 혀를 차며 수군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바보가 된 기분에 휩쌓였다. ‘매요~가 마요네즈구나’ 같은 것들을 깨달으면서..

구박 속에서 잔뜩 쌓인 설거지를 할 때면 문득 내가 신데렐라가 된 기분에 사로 잡히곤했다.

사실, 상황은 상관이 없었다

– 마음을 비우고 스스로 행운을 찾기

어느 저녁, 차가 없어서 너무너무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하나 못 먹는 상황을 한탄하다가 한국에서 가져온 책을 하나 집어들었다.  스탠포드 대학 티나 실리그 교수의 “스무살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이라는 책이었다. 한 문장이 나에게 강하게 다가왔다.

“스스로 행운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나쁜 상황에서 가치있는 부분을 찾아내는 것. 좋은 상황을 더욱 좋은 상황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읽고 또 읽고 되뇌였다. 그럴 듯해보여서 노트에도 적어두었고 아이폰에도 적어두었다.  하기야, 그제서야 이미 정해진 상황인데 아무리 불평해봤자 뭐가 달라지겠는가, 싶었다. 환경이 어떠한가, 상황이 어떠한가를 따지는 것은 사실 아무 소용없었다. 사실은 완벽하게 좋은 상황이란 세상에 없을지도 몰랐다. 어떤 상황이든지간에 상관없이 즉, 나쁜 상황이든 좋은 상황이든간에 그 안에서 최고를 건져내는 것만이 내 소관이었다.

상황에 대한 마음을 비웠고, 비우다보니 어쩐지 왠만하면 다 견딜만 해졌다. “Not bad”, “No problem” 마인드가 내 마음을 컨트롤 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어찌보면 조금은 포기하는 것이었고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 가짐으로 사는 것이었다. 몇 십분씩 도로변 걷는 것도 점점 익숙해졌고 걸을만 했다. 점점 바쁜 것도 익숙해졌고 그 안에서 쉬는 시간을 찾았다. 아르바이트도 점점 익숙해져서 능수능란하게 샌드위치를 만들었고 모든 주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 뒤로 혼나는 것은 뒤돌면 잊었고 누가 뭐라든 상관없이 묵묵히 일을 했다.

마음을 비우고 부터는 스스로 행운을 찾기 시작했다. 샌드위치가게를 찾는 손님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늘 반갑게 인사하다보니 단골 손님들 중에서 미 노동부 IT 국장과 친구가 되었다. 그 분은 나를 adopted daughter라고 부르며 딸처럼 아껴주셨다.
또 학교에도, 그 지역에도 한국인이 정말 많았지만, 나는 영어를 잘하는 베네수엘라 친구와 매일매일 붙어다녔다. 늘 함께 다니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영어가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 설명 : 가장 친했던 친구와 백악관 앞에서 )

아무리 몸이 피곤해도 미국인을 만나는 활동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갔다. 워싱턴 DC에서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즐기기 위해 Hang out 한다는 소리만 들으면 차를 얻어타서라도, 2시간을 거쳐 대중교통을 이용해서라도 갔다. 야구경기 관람, 풋볼 게임 관람, 할로윈 퍼레이드, 파티 등등 행사가 있다고 하면 무조건 갔다 왔다. 집주인 아주머니께서 대단하다고 하실만큼이나 바쁘게 돌아다니고 살았다. 나는 점점 스스로 행운을, 그리고 좋은 것을 찾아내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내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경험을 했고, 할수 있는 최대한 영어로 많이 떠들었으며 내 모든 조건을 극대화해 최고로 가치있는 시간을 보냈었다고.

( 설명 : 포트락 파티에서 만난 친구들과 )

+학교생활

학교는 정말 좋았다. 교통이 불편하다는 것 빼고는 정말 다 좋았다. 나는 정말로 학교 생활을 즐겼다. 신데렐라처럼 구박을 받으며 살다가도 수업시간에는 날라다녔다. 가끔은 불필요할 정도의 열정을 보여서 사람들을 놀래키곤 했다. 예를 들면 911 테러 10주년을 맞이해서 미국인 한 명을 인터뷰해서 발표하는 수업이 있었는데 이미 질문도 정해져있는 심플한 과제였다. 그런데 나는 18세 소년부터 시작해서 닥치는 대로 인터뷰를 하고 다녔다. 처음엔 과제였는데 나중엔 과제랑 상관없이 내 호기심이 나를 이끌었다. 911당시 펜타곤 안에 있던 미군 집주인 아저씨 이야기도 들었고 테러 당시 현장에서 테러 비행기를 눈앞에서 목격한 사람에게 모든 세부 사항들을 생동감있게 전해 듣기도 했다.  그리고는 독일 출신 옆집 아주머니로부터 조금 더 심층적인 접근도 할 수 있었다. 독일인들이 오랜 시간 히틀러 때문에 받았던 비난과 연결지어 아랍계 사람들에 대한 시선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나는 ESL 수업의 작은 발표에도 내 자신의 열정을 쫓아 멋진 발표를 하도록 노력했다.

또 수업 중에 대학 등록금 관련 Debate 를 했었는데 이 또한 열정적으로 자료를 조사하고 논거를 준비해서 열심히 연습해 간 결과, 대표로 뽑혀서 다른 반에 가서 발표를 하게 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수업 중에는 많은 활동을 했었는데, CNN 뉴스를 듣고 매일 토론하고 미국의 시나 소설등의 문학도 접하는 등 영어를 공부하러 왔지만 영어 이상의 많은 지식을 같이 배웠다. 마지막에는 시험을 봤다. 컴퓨터시험은 360중 340을 맞았고 에세이와  말하기 테스트 또한 좋은 점수를 받아 대학 본과 수업을 들을 수 있는 ESL레벨 중 가장 높은 반으로 편성되었다.

(설명 : 같은 반 친구들과 뉴지엄에서 )

+사람들

타지에 오고서야 ‘사람의 중요성’을 알았다. 사람에게 받는 도움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크게 느꼈다. 아무도 없이 온 미국에서, 정보사회학과 졸업 선배님, 미국에 계시던 멘토님 등 오기 전 조금 알고 있던 관계의 사람들, 그리고 새로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에게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타지에서 받는 도움은 한국에서보다 배로 감사하게 느껴졌고 가끔은 눈물이 났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 곳에 왔고, 또 이 곳에서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져서 힘을 내곤 했다. 사람들에게 정말 잘하고 살아야된다는 것을 사무치게 배웠다.

(설명 : 아무 것도 없이 온 내게 너무나 잘해줬던 고마운 사람들 )

지금, 나

정보사회학 Scholarship이 지원해주던 시간들이 끝났고, 나는 조금 아쉬움이 남아 미국에 더 남게 되었다. 나는 뉴욕으로 이사오기를 결심하고 한 달 전 뉴욕으로 이사를 왔다. 돈이 충분했던 것도 아니며 이 곳에 딱히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 것도 없이 이 곳으로 왔다. 뉴욕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에게 많은 말을 들었다. “돈이 엄청 많이 든다”, “한국 사람이 많다”, “공부가 안된다” 등등. 6개월 전만 같았으면 귀를 팔랑거리며, 금방 의견을 굽혔을텐데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이미 굶주리며 돈을 아끼며 살아봤고 한국 사람이 진짜 많은 그 곳에서 이미 영어 공부를 해봤다. 나는 이미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절약할 수도 있었고 사람도 금방 사귈 수 있었으며 알바하는 것도 무섭지 않았다. 나는 그저 고생을 해서라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미국의 큰 도시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싶었다. 결국 난 뉴욕으로 왔고, 나는 지금 지난 6개월간 배운 것들을 토대로  모든 것을 혼자 잘해내고 있다.

뉴욕에서 사실 지금도 나쁜 상황은 끊임없이 나를 찾아온다. 하지만, 늘 내 마음은 “Not bad, no problem” 이다.  그 다음은 스스로 행운을 찾을 일이다. 그 것이 내가 정보사회학과 Scholarship을 통해 배운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어려움이 생기는 곳이 어디든지, 그 누가 영향을 받든지, 당신은 오직 자신만 바로 잡으면 된다.” – Rhonda Byrne의 책 “secret” 중에서 

( 설명 : 뉴욕에서, 지금의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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